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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시마 미치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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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1561년 무라카미 수군의 일족으로 태어나, 1567년 외할아버지의 지목으로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원하여 세력을 확장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했다. 특히 정유재란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난중일기》의 마다시와 동일 인물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그의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분고국으로 영지를 옮겨 모리 번을 열었다.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과 영화 《명량》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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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시마 미치후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루시마 미치후사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소장)
인물 정보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출생에이로쿠 4년 (1561년)
사망게이초 2년 9월 16일 (1597년 10월 26일)
어릴 적 이름우시마쓰마루 (牛松丸)
통칭스케베에 (助兵衛)
다른 이름미치마사 (通昌)
계명세쓰간인 덴소 조세이 (節巌院天叟常清)
묘소에히메현 마쓰야마시 호조 시모난바의 다이쓰지 (大通寺)
관위종5위 하, 이즈모노수 (出雲守)
씨족무라카미 씨 → 구루시마 씨
가족 관계
아버지무라카미 미치야스
어머니고노 미치나오(彈正少弼)의 딸
형제도쿠이 미치유키
구루시마 미치후사
무라카미 미치키요
쇼케묘주 (松渓妙寿, 호이다 모토키요 정실)
여자 (무라카미 다케요시 실)
고노 미치나오(牛福丸) (이설 有)
배우자히라가 다카무네 혹은 히라가 히로스케의 딸
자녀미치노리, 나가치카
경력
주군고노 미치노부
미치나오
도요토미 히데요시

2. 생애

덴쇼 13년(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 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휘하에서 선봉으로 참전하여 옛 주군이었던 고노씨를 공격했다. 이 전공으로 이요국 가자하야군(風早郡) 1만 4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 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가했다.[5]

2. 1. 초기 생애와 가독 상속

에이로쿠 4년(1561년) 무라카미 수군의 일족인 이요 무라카미씨(伊予村上氏)의 당주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567년(에이로쿠 10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외할아버지인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 의해 배다른 형 셋을 제치고 일곱 살의 나이로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대대로 고노 가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구루시마 가문은 미치후사의 대인 1570년(겐키 원년) 고노 미치노부(河野通宣)가 무로마치 막부에 바쳤던 공금을 빼돌리는 등 차츰 고노 가문에 대한 독립적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고노 집안의 동맹이던 모리씨(毛利家)가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을 공격하는데 원군으로써 참가해 오토모씨(大友家)의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당시 해전에서의 작전을 놓고 모리 수군을 거느리고 있던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武吉)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2. 2. 고노 가문과의 관계 및 모리 가문과의 갈등

에이로쿠 4년(1561년) 무라카미 수군의 일족인 이요 무라카미씨(伊予村上氏)의 당주 무라카미 미치야스(村上通康)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에이로쿠 10년(1567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외할아버지인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 의해 배다른 형 셋을 제치고 일곱 살의 나이로 후계자가 되었다. 대대로 고노 가문의 영향 아래 있었던 구루시마 가문은 겐키 원년(1570년) 고노 미치노부(河野通宣)가 무로마치 막부에 바쳤던 공금을 빼돌리는 등 미치후사 대에 이르러 차츰 고노 가문에 대한 독립적인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고노 집안의 동맹이던 모리씨(毛利家)가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을 공격하는데 원군으로써 참가해 오토모씨(大友家)의 수군과 싸웠으나, 당시 해전에서의 작전을 놓고 모리 수군을 거느리고 있던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武吉)와 사이가 악화되었다.

2. 3.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협력

덴쇼 10년(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하시바 히데요시의 권유로 오다 가문을 지원하고자 모리 가문이나 고노 가문을 공격하여, 그들의 근거지를 순식간에 히데요시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5] 가시마성에서 항전하던 형 도쿠이 미치유키를 히데요시 편으로 삼고, 히데요시와 모리 가문과의 화친이 성립된 뒤 옛 영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히데요시는 미시마 무라카미 씨 집안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자신의 편으로 가담한 미치후사를 중용했고, 이때 성을 무라카미에서 구루시마로 바꾸게 되었다.[5]

히데요시는 미치후사를 "구루시마, 구루시마"라고 부르며 중용했기 때문에, 미치후사는 성을 무라카미에서 구루시마로 고쳤다.[4] 연대는 불명이지만, 도요토미 씨 성을 하사받았다.[4]

2. 4.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참전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처음에는 시코쿠 세력을 이끌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5번대에 배속되어 충청도 방면에서 육전에 종사했으나, 이순신 등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가 흔들리자 다시 수군을 지휘해 조선 수군과 맞서게 되었다.[5]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참전, 남원성 전투 당시 6백 명을 거느리고 육군으로서 싸우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수군과 함께 전라도 방면의 조선 수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진격했지만, 9월 16일에 진도 울돌목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전사하였다(명량 해전). 향년 37세였다.[5] (참고로 미치후사의 형 미치유키는 1592년 당포 해전 때 전사했다.)

울돌목에서의 승리 후 이순신은 보급과 전력 열세 등의 문제로 수군을 거느리고 고군산군도까지 퇴각했고, 일본군이 부안까지 진출하며 강항이 포로로 잡히는 등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경기도 죽산(竹山)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이 수군으로부터의 보급 문제로 남쪽으로 항구를 찾아 내려오는 등 수륙 병진(竝進)을 통한 한양 공격 작전을 세우고 작전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울돌목에서의 패전으로 당초의 작전 계획이 모조리 무산되었고, 한겨울에 남해안 일대로 흩어져 본진이 있는 경상도 해안가로 돌아가 왜성을 쌓고 농성해야 했다.

흔히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왜장 마다시(馬多時)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는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대의 기록일뿐 명량 해전 전체를 기록한것은 아니다. 조선 수군은 임하도를 중심으로 두 패로 나누어서 서로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선묘중흥지"에는 '내도수(來島守, 조선 사료에서 가리키는 구루시마)'는 마다시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통제사가 화공으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수군을 공격할 때 사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다시란 인물의 후보중에 아와지섬(淡路島)을 중심으로 활약한 해상세력 간 씨(菅氏) 집안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간 마사카게(菅正陰)로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되던 인물이 거론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명량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6]

이 해전에서는 미치후사 등 선봉의 피해가 컸지만, 일본 수군은 전라도 서안으로의 진출을 달성했다. 일본 측의 포로가 된 강항은 『간양록』에서 일본의 무장의 시스템에 대해 "전사한 장수의 자제들이 직을 잇고, 이케다 히데오가 진도 (또는 안골포)에서 병사했을 때는 아들 히데우지가 즉시 군중에서 대신 직을 받고, 미치후사가 전라 우수영에서 전사했을 때도 동생이 대신 그 성에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미치후사의 패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구루시마 가문의 명맥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기던 장남 미치노리가 사망했기 때문에 차남 나가치카가 이었다.

2. 5. 명량 해전에서의 전사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다. 처음에는 시코쿠 세력을 이끌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5번대에 배속되어 충청도 방면에서 육전에 종사했으나, 이순신 등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가 흔들리자 다시 수군을 지휘해 조선 수군과 맞서게 되었다.[5]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나자 다시 참전, 남원성 전투 당시 6백 명을 거느리고 육군으로서 싸우다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수군과 함께 전라도 방면의 조선 수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진격했지만, 9월 16일에 진도 울돌목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전사하였다(명량 해전).[5] 향년 37세였다. 참고로 미치후사의 형 도쿠이 미치유키1592년 당포 해전 때 전사하였다.

울돌목에서의 승리 후 이순신은 보급과 전력 열세 등의 문제로 수군을 거느리고 고군산군도까지 퇴각했고, 일본군이 부안까지 진출하며 강항이 포로로 잡히는 등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경기도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이 수군으로부터의 보급 문제로 남쪽으로 항구를 찾아 내려오는 등 수륙 병진(竝進)을 통한 한양 공격 작전을 세우고 작전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울돌목에서의 패전으로 당초의 작전 계획이 모두 무산되었고, 한겨울에 남해안 일대로 흩어져 본진이 있는 경상도 해안가로 돌아가 왜성을 쌓고 농성해야 했다.

흔히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왜장 마다시(馬多時)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난중일기는 통제사가 이끄는 공격대의 기록일 뿐 명량 해전 전체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조선 수군은 임하도를 중심으로 두 패로 나누어서 서로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선묘중흥지"에는 '내도수(來島守, 조선 사료에서 가리키는 구루시마)'는 마다시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통제사가 화공으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수군을 공격할 때 사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다시란 인물의 후보 중에는 아와지섬(淡路島)을 중심으로 활약한 해상 세력 간 씨(菅氏) 집안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인 간 마사카게(菅正陰)로 마타시로(又四郎)라는 통칭으로 불리던 인물이 거론되고 있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명량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도 서로 같다.[6]

이 해전에서 미치후사 등 선봉의 피해가 컸지만, 일본 수군은 전라도 서안으로의 진출을 달성했다. 일본 측의 포로가 된 강항은 『간양록』에서 일본 무장의 시스템에 대해 "전사한 장수의 자제들이 직을 잇고, 이케다 히데오가 진도 (또는 안골포)에서 병사했을 때는 아들 히데우지가 즉시 군중에서 대신 직을 받고, 미치후사가 전라 우수영에서 전사했을 때도 동생이 대신 그 성에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미치후사의 패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구루시마 가문의 명맥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기던 장남 미치노리가 사망했기 때문에 차남 나가치카가 이었다.

2. 6. 명량 해전 이후

명량 해전에서 구루시마 미치후사 등 선봉대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 수군은 전라도 서안 진출에 성공했다. 일본 측 포로 강항간양록에서 "전사한 장수의 자제들이 직을 잇고, 이케다 히데오가 진도 (또는 안골포)에서 병사했을 때는 아들 히데우지가 즉시 군중에서 대신 직을 받고, 미치후사가 전라 우수영에서 전사했을 때도 동생이 대신 그 성에 있게 되었다"라며 일본 무장 시스템과 미치후사의 전사를 언급했다.[6]

이순신은 울돌목 승리 후 보급 및 전력 열세로 고군산군도까지 퇴각했다. 일본군은 부안까지 진출, 강항이 포로로 잡히는 등 서해 진출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수군 보급 문제로 남하, 수륙 병진을 통한 한양 공격 계획이 울돌목 패전으로 무산되고, 경상도 해안 왜성에 농성해야 했다.

3. 《난중일기》의 '마다시'와의 동일 인물 논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왜장 '마다시(馬多時)'가 등장하는데, 이 인물이 구루시마 미치후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이끄는 공격대의 기록일 뿐, 명량 해전 전체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조선 수군은 임하도를 중심으로 두 패로 나뉘어 각기 다른 작전을 수행했다. "선묘중흥지"에는 '내도수(來島守, 조선 사료에서 가리키는 구루시마)'가 마다시와 다른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순신이 화공으로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수군을 공격할 때 사망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다시로 거론되는 인물은 아와지섬(淡路島)을 중심으로 활약한 해상세력 간 씨(菅氏) 집안의 간 헤이에몬(菅平右衛門)의 아들 간 마사카게(菅正陰)이며, 통칭 마타시로(又四郎)였다.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 또한 명량에서 죽었고, '마타시로'와 '마다시'의 일본어 독음은 서로 같다.[6]

4. 가계

미치후사의 장남 미치노리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기다가 사망하였고, 차남 나가치카가 가문을 이었다. 나가치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으나, 그의 부인 겐쿄인(후쿠시마 다카하루의 딸)의 백부(妻伯父)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의 연줄로 혼다 마사노부를 통해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다.[1] 게이초 6년(1601년)분고국 구스군으로 영지가 옮겨지고, 모리 번을 열었으며 이후 바다와는 완전히 분리되었다.[1] 나가치카의 아들 구루시마 미치하루부터는 성씨가 구루시마 씨(久留島氏)로 바뀌었다.[1]

사촌으로는 무라카미 가게치카가 있다.[1]

5. 대중문화 속의 구루시마 미치후사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유병준이 구루시마 미치후사 역을 연기했다.[2]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명량》에서는 류승룡이 구루시마 미치후사 역을 연기했다.[2]

참조

[1] 웹사이트 菅平右衛門の子弟 http://homepage2.nif[...]
[2] 웹사이트 The Admiral (2014): Full Cast and Crew https://www.imdb.com[...] 2017-03-05
[3] 서적 戦国末期における芸予関係の展開と婚姻」「織田政権の西国侵攻と瀬戸内海賊衆 清文堂出版 2005
[4] 간행물 羽柴氏下賜と豊臣姓下賜 1996
[5] 문서 일본의 역사학자 [[무라카와 고헤이]](村川浩平)는 연대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미치후사가 히데요시의 [[도요토미씨|도요토미성]]을 사성(賜姓)받은 적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6] 웹인용 아와지 간 수군의 역사_10장_간 헤이에몬의 자제 http://homepage2.nif[...] 201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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